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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나라 Doalnara

이미 길고 긴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선생님께서 하늘의 뜻대로 사시려고 외길을 걸으시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느라 분주하셨던 가난한 시골 살림 동안에도, 초대 강의하시고 받은 강의비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느라고 형편이 풀리지 않는 가난의 긴 세월 동안에도 선생님 곁에서 늘 함께 힘과 격려가 되어 주셨던 사모님이셨다. 현모양처 사모님은 그 어려운 시기 동안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적이 없었다. 선생님과 자녀들 뒷바라지하시며 또 강의 때마다 봉사하시는 분들 중 한 사람이 되어 함께 식사 준비하고 봉사하시느라 허리를 숙이고만 지내셨다. 늘 선생님 뒤를 따르며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 구부려 인사하시는 모습이 인상으로 새겨진 사모님은 선생님 말씀대로 등이 굽어져 있을 정도이다. 이젠 자녀들도 출가를 할 만..

신혼 초, 선생님과 사모님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실 때였다. 사모님은 결혼 전부터도 음악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다. 처녀 시절 생활비를 위해 편물을 짜는 동안에도 음악을 틀어 놓고 해야 일이 잘되었고,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들기까지 녹음기나 테이프, 찬양 등을 쉼 없이 들어도 지겹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셨다. 그런 아내의 취미를 선생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것이다. 드디어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사모님께 녹음기를 선물하셨다.5천 원만 가져도 한 달 용돈을 쓸 수 있던 그 당시에 10만 원을 주고 사셨다는 것은 사모님께 보통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을 마련하기 위한 몇 달 동안 선생님의 사모님께 대한 사랑과 노력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사모님은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매일 들으며 지내실 수..

약혼식 날, 선생님께서는 예쁘게 포장한 분홍색 한복감과 예물 시계를 가지고 남원으로 내려가셨다.그러나 당시 사모님의 가정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해서 만년필로 예물을 대신할 수밖에 없으셨다. 두 분 사이에서야 사랑의 마음과 정성으로 준비한 예물이니 모두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집에 돌아가서 먼 거리로 참석지 못하신 부모님께 그대로 말씀 드리기에는 좀 걱정이 되셨다. 짧은 하루가 마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갑자기 선생님께서는 하얀 봉투를 내밀며 사모님께 받으라고 하셨다. 왜 그러시냐고 영문을 몰라 하시는 사모님께 "일단 내가 주는 돈이니 받아요." 하시며 손에 들려 주셨던 선생님께서는 다시 "이제 그(소유한) 돈을 나에게 주세요." 하셔서 받아 가셨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봉투에는 꽤..

며칠 동안 청년 모임으로 다녀온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지금까지는 엄마가 너희들을 위해 다 봉사했지만 이제는 너희들도 컸으니까 너희가 엄마를 위해 다 해 드려야 된다." 하시며 아직은 10대의 딸들에게 부엌일을 맡아서 하도록 하셨다. 딸들에게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도 살림하는 법을 가르치셔서 9세 정도 되었을 때에는 스스로 밥도 차리고 밭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새참도 날라다 주도록 하셨었다. 그래서 지금은 못하는 요리가 없을 만큼 늘 어머니를 도와 왔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일을 전적으로 물려 받게 된 것이다.아무튼 즐겨 순종하는 딸들 때문에 그날 이후로 사모님께서는 특별한 경우 외로는 부엌에 오지 않으셨다. 시간을 얻으신 사모님께서는 그 동안 선생님께서 하시던 것처럼 무의탁 노인들,..

식사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항상 어김없이 건너 채에 가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오셨다. 식사를 다 마치신 후에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정확한 표준어와 발음으로 누구도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시는 것을 스스로 훈련하셨던 선생님이지만 어머님께만은 여지없이 충청도 사람이 되신다. 식사하시는 동안에도 "엄니, 요거 맛있어유. 요것 드세유." 하시며 어머니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맛있는 것은 어머님 밥 위에 올려놓느라 바쁘시고 과일을 좋아하시는 장모님 손에 손수 까서 쥐어 드리신다. 선생님은 어머님들의 식단에 매우 관심이 많으셨다. 혹여 어머님이 입맛이 없으셔서 특별한 음식을 찾곤 하시면 어김없이 구해 드리셨다. 어머님께서 편찮으실 때는 "그럴 때 노인들은 더 외로움을 타시지." 하시며 항상 같이..

선생님은 아버님 돌아가신 후 두 어머님을 모셨다. 한 분은 친어머님이셨고, 또 한 분은 장모님이셨다. 친어머님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80세부터 심하게 앓으시면서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 어릴 때부터 형님들과 동생이 "나중에 어머님은 내가 모셔야 돼." 할 때 선생님께서는 마음속으로만 소원하시고 표현은 없으셨다. 세월이 흐른 후 어머님께서 편찮으시던 해 추석에 큰형님 댁에 가셨다가 어머님을 모셔 오게 되었다. 건강이 너무 안 좋아지셔서 곧 돌아가실 것 같아 쉬면서 쉬면서 모시고 왔는데 다행히 점점 건강해지셔서 92세까지 향수하시도록 함께 지내셨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좋은 것이 생기면 늘 어머님께 드리고, 또 예쁜 것이 있으면 달아 드리셨는데 "후회 없이 어머님의 여생을 모실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